변하지 않은 나에게 보내는, 뒤늦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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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record 2026. 02. 16 8 min

변하지 않은 나에게 보내는, 뒤늦은 편지

30년은 족히 넘은 노래가 편의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무언가를 집어 들려던 손이 멈춘다. 그 노래로 다른 노래를 만들던 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이다. 30년은 족히 넘은 노래가 편의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무언가를 집어 들려던 손이 멈춘다. 뭘 사려고 했는지도 잊는다. 왜 멈췄냐고 묻는다면, 그 노래로 다른 노래를 만들던 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노래를 가난이라는 서랍에 넣어 잠가 두었다. 그 서랍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Old song playing

🎼 서툰 선율의 기억

열다섯 살의 나는 교실 창가에 앉아 있다. 공책 한쪽에 오선지를 긋고 음표를 올려놓는다. 하나 올리고, 하나 내리고, 다시 올린다. 선율이라고 부르기엔 서툴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나는 그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편지에 가까웠다.

지금도 그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 있다. 가사는 반 이상 잊었는데, 후렴 첫 마디에서 목이 잠기는 건 여전하다. 아마 성대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Composition notebook

🔒 닫힌 서랍들

수업 시간에 연필로 책상을 두드렸다. 리듬이 맞으면 기분이 좋았고, 안 맞으면 다시 두드렸다. 나는 음악 쪽으로 자꾸 손이 갔다.

어느 날인가, 내가 왜 이 얘기를 꺼냈는지, 왜 아직도 기억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가수가 되겠다고 입 밖에 꺼냈을 때, 아버지는 밥을 먹다 말고 나를 봤다. 그 눈빛 한 번이면 충분했다. 가난한 집에서 그 꿈은 사치였고, 나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되겠다고 말을 바꿨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누군가 앞에 서서 무언가를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첫사랑에게 노래와 그림을 만들어서 줬다. 맞나? 아닌 거 같다. 줬다는 말은 맞지 않는거 같다. 건넨 적이 없으니까.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 아이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어느 서랍 위에 올려두고 왔다. 그 서랍은 그녀의 것이었을까. 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도 없을 때. 얼굴을 마주하면 아무 말도 못 할 게 뻔했으니까.

나는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삼키고, 줘야 할 마음은 주머니에 구겨넣은 채 돌아서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시선을 바닥에 두는 버릇. 그 버릇은 늙지 않는다. 성인이 된 지금도,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 앞에서 나는 같은 자세로 굳는다.

꿈도 그런 식으로 놓고 왔다. 악보 위 음표들처럼 한참을 오르내리다가, 결국 어딘가에 접혀 사라졌다.

어린 시절, 나는 가난했다. 가난은 편리한 서랍이었다. 처음부터 가난을 변명으로 내세운 건 아니었다. 책을 못 사고, 친구들과 함께 어딜 가지 못하고, 하고 싶은 걸 못 하게 되면서 알았다. 가난이 내 꿈을 하나씩 포기하게 만든다는 걸. 나는 포기들을 그 서랍에 차곡차곡 넣어 잠가 두었다. 그 안에 넣어두면, 누구도 꺼내 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소심한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Drawer of poverty

🪞 거울 속의 진짜 얼굴

나는 오랫동안 가난 때문이라고 믿었다. 돈이 없어서 음악을 못 배웠고, 형편이 안 돼서 꿈을 접었고, 환경이 나를 거기까지 데려다주지 못한 거라고. 그 이야기는 단단했고, 나는 그 안에서 편안했다. 누가 물어도 같은 대답을 했다. 잘 외운 대사처럼.

그런데 지금의 나를 본다. 가난에서는 벗어났다. 월급은 통장에 찍히고,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있고, 새벽에는 커피를 내려 마실 여유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건네야 할 마음을 내일로 미루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핑계였던 것 같다.

가난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겁이 많았을 뿐이다. 실패할까 봐. 거절당할까 봐. 내가 정성 들여 만든 노래가 별것 아닌 걸로 드러날까 봐. 가난은 그 겁을 숨기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아무도 가난한 아이의 포기를 비겁하다고 말하지 않으니까. 나는 그 동정의 그늘 아래 오래 서 있었다.

거울은 좌우가 뒤집힌다. 내가 기억하던 그때도 뒤집혀 있었다. 가난이 앞에 서고 두려움이 뒤에 숨는 구도. 진짜는 반대였다.

Reflection in mirror

📻 다시 흐르는 노래

다시 그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는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책상 서랍 위에 노래를 올려놓고 복도를 뛰어간 너에게. 아버지의 눈빛 한 번에 입을 다문 너에게. 가난이라는 서랍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너에게.

너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성인이 된 후에도 같은 곳에서 멈칫하고, 같은 방식으로 입을 다물고, 같은 종류의 두려움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이 나이 먹도록 달라진 게 없는 내가 한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어젯밤에도, 새벽에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이상한 일이다. 한심하지가 않다.

변하지 않았다는 건, 네가 아직 여기 있다는 말이다. 겁이 많았지만 그래도 노래를 만들 줄 알았던, 건네지는 못했어도 놓고 올 줄은 알았던, 그 아이가 아직 내 안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너는 노래를 만들었다.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랍을 열자. 다시 꺼내 보자.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네가 다시 부르기 시작한다면."

오늘의 나를 위한 위로

Reedo

Written by Reedo

Global Field Engineer & Automation Architect

복잡한 코드 속에 담긴 단순한 진심을 찾습니다. 때론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그 과정들이 모여 더 나은 내일을 만든다고 믿으며 묵묵히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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